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문단 편집) === [[일본 제국]] === [[러일전쟁]]과 [[러시아 혁명]]으로 북방세력의 남하 걱정이 사라지면서 영일동맹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일본은 독자적인 세력강화와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막강한 해군력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여기에는 러일전쟁 승리,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로 힘이 강해진 해군의 강력한 요구와 군부의 팽창주의적 사고가 결합되어 있었으며 해군은 1916년 84함대, 1918년 86함대에 이어 전후인 [[1920년]]에 [[88함대]] 편성을 요구, 의회의 승인을 받고 예산까지 타냈다. 88함대란 말 그대로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으로 구성된 해군 주력함대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이 나온 이유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가 러일전쟁 직후 세계해전의 역사와 러일전쟁에서의 해전상황을 분석하여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중심으로 해군전력을 구축하고, 예비전력으로서 노후화된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보유하는 것- 즉, 전함 총 16척과 [[장갑순양함]] 16척 -이 이상적이라는 결과를 내면서 일본해군에서 88함대 이론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일본 해군은 보유함 대부분이 건조된지 오래된 노후함이거나 러일전쟁 당시 노획하여 편입시킨 노후함이라는 이유로 신조함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사실 그 노후함들은 이미 예비전력이었으니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1년]] 시점에서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해군의 건함사업에 자연스레 반발이 일어났다. 당장 군국주의로 미처 돌아가기 시작하여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인 1930년대 초중반에도 국방예산이 전체 예산 중 2할 이내로 억제되었으니 이는 당대의 건함사업의 중요성을 감안해도 분명히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함은 주력화기로 11~12인치 거포 4문을 탑재하고, 장갑순양함은 8~9.4인치 중간포 4문을 주력화기로 사용하는 물건이어서 당시 일본의 재정 상황으로도 88함대는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일본해군은 32척의 주력전투함은 환상이나 다름없고 16척이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포다수탑재함인 [[드레드노트]]와 일반적인 장갑순양함을 넘어서는 덩치 및 전함의 주포와 동등한 화포를 다수 탑재하는 [[인빈시블급 순양전함]]이 등장하면서 주력함 건조비용이 척당 3배 이상 치솟아 버렸고, 일본 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게다가 전함과 순전 8척씩만 찍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호위할 수 있는 순양함 수십 척과 구축함 백수십 척, 항공정찰과 포격관측을 위한('전함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항공력이 필요하다는 사상이었다) 항공모함 다수, 그들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보조함대 수십 척, 잠수함 백여 척에 지원함대까지 건조해 해군 자체를 일신하는 계획이었으니 일본으로선 감당하긴 어려웠다. 88함대 계획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대체역사 동인지인 [[http://www.cwo.zaq.ne.jp/bface700/88fleet1934_top.html|88함대 1934]]에 따르면 '88함대를 건조하는 것만으로 끝없이 총력전'이었으며 결국 88함대를 건설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역사를 개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